을지로체 영상은 을지로의 이야기와 디자인 유산을 기억하는 수단으로 소비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오전과 오후의 중요한 일이 다르고 어제 새로웠던 것이 오늘은 지나간 것이 되는 요즘. 빠른 세상 속 10년, 20년, 25년 된 간판을 걸고 일하는 곳은 오히려 새롭다. 을지로 공구거리에 가면 붓으로 그린 오래된 간판들이 눈에 띈다.
흰 바탕에 검은 페인트로 힘주어 써 내려간 상호와 붉은색으로 적힌 전화번호. 흰 바탕과 검고 붉은 글자의 조형성은 헐거워서 이리저리 흔들거리다가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간판에 쌓인 먼지들과 벗겨진 페인트가 이곳의 글자들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알려준다. 흉내 낼 수 없는 세월의 흔적들은 을지로 공구거리 곳곳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고 새로운 것들과 충돌하며 대비된다.
버려졌던 을지로 공구거리 간판
공구거리의 가게들이 문을 닫고 간판들도 버려진다. 여덟 번째 폰트의 영감을 찾아 을지로를 탐방하던 디자이너들은 허물어진 건물 구석에서 버려진 간판을 주워 모았다. 완전히 박살 나버린 것들도 있다.
아깝다, 이런 간판들은 누가 만든 걸까?
근대 대한민국 을지로 공구거리가 첨단의 중심이었던 시절. 공업소 간판을 붓으로 그리는 간판 장인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산업의 중심이 변하며 옛것이 밀려나고 새로운 것들로 채워졌다. 사람도 간판도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갔다. 붓으로 간판 그리는 일도 줄었고 간판 할아버지라 불리는 전설의 간판 장인은 2017년 이후 본 사람이 없다.
25년 된 간판. 자전거 뒤에 페인트 통을 싣고 다니며 간판을 그렸던 할아버지. 간판 그리려면 할아버지 지나가길 기다리던 시절. 넓은 나무판에 흰색 페인트로 배경 칠해두고 마를 동안 동네 한 바퀴 돌다 반나절 후에 와서 쓱쓱 한 번에 그리는 글씨. 간판 그리다가 틀리면 슥슥 고치는 노련함.
간판에 얽힌 이야기를 파고들며 폰트 프로젝트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이제 간판 할아버지는 찾을 수 없지만 그가 그렸던 간판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 아직도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보전하고 기록해두고 싶은 것들이 많다.
을지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간판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자.
8번째 폰트가 을지로를 기억하는 수단이 된 것처럼 영상의 방향도 바뀌었다. 폰트 제작 과정의 수고로움이나 디지털로 구현한 폰트의 미려함도 담지 않았다. 간판 할아버지는 결국 찾지 못했지만 우리를 이끌어 줬던 을지로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담았다. 을지로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